플라톤에 의하면, 오류(l'erreur)는 이중 무지이다. 즉 모르는 것의 무지와 모르는 것을 안다고 믿는다는 것의 무지이다. 결국 무지한 자는 그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En somme, on ignore qu'on ignore).


착각(l'illusion)은 오류이지만, 착각에는 오류에 없는 특징이 있다. 오류는 고쳐질 수 있지만 착각은 반박을 받더라도 살아 남는다. 왜냐하면 지각의 착각의 경우에서, 아침의 태양은 언제나 낮의 태양보다 크게 보인다.

무엇이 오류를 착각으로, 즉 비판과 반박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만드는가? 1)우리의 육신(notre corps), 지각의 착각, 2)우리의 욕망(nos désirs), 애정의 착각, 3)우리의 이익(이기심, nos intéréts), 이기심의 집착, 4)순수 이성(la raison pure), 지식의 완고함, 등은 착각(또는 오류)을 발생하게 한다. 이 마지막의 성향은 인간의 궁극적 원인의 설정과 같은 오류를 만들 것이다.

철학이든 과학이든 전통적인 사유는 오류에 대해 반박한다. 정신분석학과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오류의 반박의 반박으로 해결되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철학 중에는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반박하지 않고, 상대방을 착각자로 만들어 상대방 자신의 숨은 욕망과 숨은 이익을 드러내려는(폭로하려는) 의혹(낌새)의 철학도 있다. 사실, 상부의 부역자들이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정도의 상부이익의 대변자였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노력에 대해 이 상부 협력자는 자신의 진실을 보기 보다 자신의 병(이중의 무지)속에 은신하려 한다.

이렇게 병 속에 은신하려는 철학을 하는 자의 낌새를 알아차린 철학자(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들이 있다. 왜 이들은 상대방의 검증가능성, 오류가능성 등의 기준에 대해 반박하려하지 않고 상대방의 논리의 의미(sens)를 논할까? 영미철학의 과학적 진리와 과학 방법론은 기호화(통지, signification) 즉 징후(symptôme)에 머문다. 프랑스 담론의 철학은 의미(sens) 즉 경향(tendance, 또는 욕망)을 다룬다. 여기는 단순함과 진솔함이 있다.
(구름은 언제나 바람처럼 떠다니고, 산은 제자리에 있으나 항상 치장을 달리한다.)

(삶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단순함만이 있을 뿐이다. 만일 진리가 진실 그대로 드러나서(manifester) 통지한다면(signifier),
지금 여기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착란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1. 착각의 정의(définition)


*이중의 무지



-라틴어의 동사 illudere는 장난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속이다, 농락하다, 허구를 실재로 생각하다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l'illusion(착각)이란 단어는 illudere의 수동형에서 나온 명사로, 놀림 받는 자, 속는 자, 농락 당하는 자의 상태를 가리킨다.



-착각(l'illusion)이란 말의 뜻에는 무지, 지식의 결여, 진리의 부재와 같은 소극적인 측면도 있고, 나의 믿음이 틀렸다 하더라도 나의 믿음을 진심으로 긍정한다는 측면도 있다.



-플라톤(Platon)의 (『소피스트(Sophiste)』 229C, 『법률(Nomoi)』 863C)말처럼,



착각은 이중의 무지이다; 즉 지식의 단순한 결여가 아니라 지식의 결여를 모르는 것이다. 착각은 참된 것을 모르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이중의 무지이다



*착각과 공상(l'imaginaire)



-착각은 일종의 공상 즉 상상이다; 착각은 상상에 속하지만, 상상은 착각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



-사르트르(Sartre)의 상상 기능론은 꿈꾸는 사람이나 환각증 환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착각과 유토피아(utopia)를 구별하여야 한다.



유토피아는 일종의 실천이다; 이와는 반대로 착각은 수동적이다. 왜냐하면 착각한다는 것은 오류의 포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오류의 문제와 고전적 이론



모든 오류는 무지인 동시에 착각이다.



*플라톤(Platon)이 말하는 오류(l'erreur)



(1)플라톤: 모든 난점이 "존재는 존재하고,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원리에서 나온다.



선배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의 인격을 살해(parricide)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존재는 존재한다.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는 어느 정도 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며, 무에 대한 사유는 사유하지 않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플라톤 『테아이테토스』에서 오류의 가능성을 설명하면서, 관념들의 다수성을 말하였고 또 여러 관념들을 결합할 때 혼동이 생겨날 수 있다고 보았다.플라톤은 『소피스트』에서, 이데아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많은지를 보다 기술적이고보다 추상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 한다. 류(les genres)는 존재와 무로 환원되지 않는다. 류는 다름, 운동, 정지 등등과 같이 여러 가지로 구별되어야 한다. 결국 그는 정신이 표면적인 것에 속을 수도 있고 지적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오류



(2)데카르트(Descartes)는 "Méditation"의 "네 번째 성찰"에서 착각의 존재를 부정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에서 Cogito의 자명함은 부정할 수 없다.



나의 오성은 유한한 오성이다. 그래서 판명하지 않는 관념들이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나의 무지(mes ignorances), 나의 무지의 수, 나의 무지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은 되지만, 나의 오류(mes erreurs), 나의 착각(mes illusions) 에 대한 설명은 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오류를 설명하기 위하여 의지를 도입한다.



오류는 우리의 작품이며, 우리의 책임이다. 오류는 글자 그대로 나의 의지가 책임져야 하는 죄(un péché)이다. 오류는 과오(une faute)이다.



우리는 선입견과 조급함 때문에 우리는 속는다(se tromper).



*스피노자(Spinoza)가 말하는 오류



(3)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오류론의 두 요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첫째는,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은 참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틀린 판단의 책임은 인간의 의지에게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첫 번째 것에만 찬성한다.



오류란 어떤 관념은 그 관념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또 그 관념에게 결여되어 있는 진리의 충만성 때문에 틀린 관념이 된다.(『윤리학』 제2부 명제 33)



스피노자에서 오류란 무엇인가?



사유는 존재와 동일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착각을 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상상이 우리의 오류, 부적합하고 완성되지 않는 관념의 근원이다.



스피노자는 『오성개선론(Traité sur la Réforme de l'Entendement)』에서



"영혼은, 영혼 자신의 힘만으로, 마치 신인 것처럼, 사물들과 관계가 없는 감각이나 관념을 창조한다."



-이러한 지각의 유한성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인 지식뿐이다.



-원인과 결과의 고리를 끝까지 추구하면, 그 끝은 무한 속으로 연결된다.



-우리의 오류는 부분적인 진리와 같은 것이다.



-착각 속에 오류가 있다는 것은 단지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의 결여일 뿐이다. 착각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상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착각(l'illusion)의 두 주체



*착각된 주체와 인식하는 주체



"땅에서 200보 떨어져 있는 태양"이라는 스피노자의 유명한 예를 분석해 보면, 두 주체의 변증법에 의해서만 착각을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주체는 지각의 주체, 두 번째 주체는 오성의 주체, 이성적인 맥락에서 사유하는 주체이다.



착각이란 개념은 두 개의 주체를 등장시킨다. 하나는 착각의 희생이 된 속는 주체이고, 다른 하나는, 속는 주체는 모르는 진리의 규범에 의거하여 착각을 알고 착각을 못하게하는(déjouer) 주체이다. 이 두 번째 주체가 인식하는 주체(sujet connaissant)이다. 이 주체는



(1)허위를 참으로 대치시킬 수 있고,



(2)어떻게 그리고 왜 착각이 생겨나는가를 설명할 수 있고, 왜 그리고 어떤 메카니즘 때문에 첫 번째 주체가 속는가를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주체의 차원에서는, 착각은 초월될 수 없다.



스피노자의 두 주체,



(1)착각에 의해서 농락 당하는 주체, 그래서 착각을 착각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주체;



(2)착각을 초월한 주체, 그래서 착각을 설명하는 주체.



플라톤이 말하는 소피스트, 데카르트가 일시적으로 믿는 척했던 거짓말하는 신(le dieu-trompeur, malain génie) 등은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이들은 허구(les apparences fictives)를 허구라고 말하지 않고 허구를 만든다. 따라서 진정한 착각에는 비극적인 특성이 있다.



착각의 비극성은 지식의 첫 번째 장르로부터 두 번째 장르로 옮겨가는 데 있는 난관 속에 나타난다. 착각이 무엇인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착각에서 깨어날 수 있겠는가?



*플라톤과 착각의 비극



플라톤은 『국가론(Politeia)』7권에서, 두 개의 담론의 분리, 즉 착각 속에 있는 자의 담론과 착각을 치료하고 착각에서 벗어난 주체의 담론의 근본적이고 비극적인 분리를 잘 표현한다.



착각에서 벗어난다(dés-illusion)는 수수께끼는 신화로 승화된다. (프랑스어로 착각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dés-illusion이며 dés-illusion의 어원은 희랍어의 aletheia이다. 그런데 희랍어의 aletheia는 진리를 의미한다.)



플라톤의 이 유명한 신화에서(『국가론』515c에서) 한 죄수가 동굴 밖을 보았을 경우,



자유롭고 이성적이 된 두 번째 주체의 근본적인 초월을 착각의 희생자인 첫 번째 주체와 관련 시켜서 잘 설명하였다.



플라톤과 같이 무대 뒤에 숨어있는 낭독자만이 착각의 사실을 착각의 사실로 제시한다.



바슐라르(Bachelard)의『과학적 정신의 형성(Formation de l'Esprit scientifique)』에서



"빛이 어두움으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과학자의 경우에도 지식은 무지로부터 나온다. 무지는 적극적이고 탄탄하고 밀접하게 연결되어져 있는 오류들로 짜여진 하나의 옷감이라는 것을 과학자들은 모른다. 그들은 정신적인 어두움에도 하나의 구조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4. 지각의 착각(les illusions de la perceptoin)- 착각이라고 판정된 지각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17세기까지, 비판적 정신의 대상이 된 착각은 주로 감각의 착각이다.



*감각의 착각과 신기루(mirages)



아리스토텔레스는 검지와 장지를 구부리고 그 사이에 하나의 공을 밀어 넣을 때 하나의 공이 아니라 두 개의 공이 닿는 다는 인상 지평선에 있는 달은 정상에 있는 달보다 크게 보인다.



데카르트와 말르브랑슈(Malebranch)



"없는 팔에 느껴지는 통증"을 환각적 팔에 대한 착각의 중요한 예이다.



신기루는 더운 나라에만 있는 시각적 착각이다.



레르미트(Lhermitte, 1877-1959. 프랑스의 신경과 의사) 육체가 갖는 이미지는 전체적인 도식이며, 또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체험한 전체적인 표상이다.



*지평선에 있는 달은 더 크다는 착각



말브랑슈는 이런 것을 '자연적인 판단(jugement naturel)'이라 한다.



*환각(les hallucination)



환각이나 정신병자의 망상(délire, 착란)도 위와 같은 차원의 메카니즘 때문에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망상(délire, 착란)에는 환각이 직접적으로 연장화(prolongation)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런 경우의 망상은 환각을 정연하고 지성적인 것으로 믿으려는 신앙의 체계가 된다.



*모든 지각은 착각이다.



데카르트 이래로, 감각적 착각의 문제는 두 번째 차원의 착각으로 옮겨가고 있다. 지각은 전체적으로 착각의 영역 내에서 움직이는 것이고,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학문이 전파된 이후에는 부당한 지식이라는 실격 판정을 받게 되었다.



*왜 지각된 것은 착각인가?



감각적인 성질은 순전히 주관적인 인상이다.



말르브랑슈는 가질 수 있는 명석한 관념은 연장(l'etendue)과 수(les nombres) 뿐이다.



감각의 인상에 속하는 목적은 지식의 목적이 아니라 유용하고 생물적인 목적이다.



말르브랑슈는 『진리의 탐구(Recherche de la vérité)』제1권 제5장



"감관(sens)은 사물들 자체가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우리의 육체와 갖는 관계만을 판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감관(sens)은 사물 자체의 진리를 알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말르브랑슈『형이상학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Entretiens sur la Métaphysique et la Religion)』의 제4부, 15번



감관(sens)은 "진리와의 관계에서는 거짓 증언이지만, 삶을 보존하고 편리하게 하는 면에서는 충실한 지도자이다." 감성적 환경은 첫 번째 단계의 착각(이성적인 진리에 관한 착각)이지만 유익한 착각(생물적인 목적에 도움이 되는 착각)이 된다. 즉 목적의 메카니즘이 고장난 착각이 있으며, 이러한 착각을 감관(sens)의 착각이라 한다.





5. 착각(illusion), 욕망(désir), 언어(langage)



*육체, 착각의 근원



데카르트의 지각론



모든 지각 특유의 착각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즉 이성과 진리의 결여가 아니라, 오히려 주관적인 유용성의 착각, 정념의 착각 등과 같은 적극성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간단히 말하면, 착각의 적극성은 욕망의 적극성이다.



*언어, 착각의 근원



언어는 덧없는 착각을 받아들이며, 언어는 사물화 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자유의지, 선택 능력, 주의력, 모든 결정을 초월하는 행동 능력이 있다고 상상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Ethique)』.제2부. 명제35 명제주석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면서 자신을 결정하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자유의지(libre arbtre)를 믿는다.



이것을 잘 파악하려면 언어의 함정을 잘 파악하여야 한다. 의지나 자유는 추상적인 단어일 뿐이며, 이러한 단어를 단순하게 사용하면 영혼의 기능을 신화(mythe)로 만든다.



의지는 언어로부터 나온 일반 관념들 중의 하나일 뿐이며, 순수하게 공상적인 관념이다.



스피노자(Spinoza) 『신, 인간, 인간 행복의 상태에 대한 소고(Court Traité)』



"인간은 이성의 존재들을 자연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가 있다.



의지는 일반 관념일 뿐이기 때문에, 의지에 의해서는 아무 것도 생겨날 수 없다."



형이상학적 착각은 말의 착각이며, 욕망이나 정념의 착각과 마찬가지의 착각, 또는 그 이상의 착각이다.





6. 착각과 정신분석



*억압된(refoulé) 욕망, 착각의 근원



정신분석학은 우리의 착각을 판독(déschiffrage)하고 해독(décryptage)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드는 억압(refoulement)을 강조한다.



독일의 고위 행정관인 슈레베르(Schreber) 의장과 의사(Fleschig)의 사례 (- homosexuel)



최초의 감정은 "남자인 나는 남자인 그를 사랑한다"였으며, 첫 번째로 변화시킨 것은 "나는 그를 사랑한다"가 "나는 그를 미워한다"가 되었다. 두 번째로 주제의 순서를 바꾼다. 내가 그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미워한다면, 나는 나쁜 사람이라는 죄의식을 갖게 된다.) 그가 나를 미워하고 박해한다.



박해 망상(le délire de persécution)에서의 변형(déformation)은 정서(l'affect)의 전환(retournement)이다. 내면적으로 느꼈던 것은 사랑이었는데, 외면적으로는 증오로 지각된다.



*전에 본 적(déjà vu)이 있었다는 착각 (참조원문, 기억, p. 172)



이미 본 적이 있었다는 착각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착각도 역시 욕망방어의 메카니즘에 속한다.



*종교와 착각



프로이드는『착각의 미래』(Avenir d'une illusion)에서



신앙은 착각이며, 또 전투적인 무신론도 역시 착각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어느 의과 대학생의 예 - 죽은 노파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봄



신에 대한 반항은 아버지에 대한 외디푸스적 반항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7.착각과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는 집단적 착각이다.



이데올로기란 말은 이제는 잘못된 표상들의 체계, 정확하게 말하면 착각들의 체계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어떤 집단 특유의 착각, 어떤 사회 계층에 속하는 착각을 의미한다.



엥겔스(Engels)는 1893년 7월14일에 메에링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보낸다: "이데올로기는, 소위 사상가라는 사람들이 의식을 가지고 수행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잘못된 의식을 가지고 수행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사상가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그 사상가 자신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d'Aquin) 『신학대전(Summe Théologique)』에서



천사의 위계(chérubins, séraphins, trône, domination, orincipauté, archange, ange) 등은 왕과 최하층 농노의 종속관계와 같이 지상에 실제로 실재하던 봉건 계급을 신학의 하늘에 투영한 것이 아닐까?



*착취(l'exploitation)는 이데올로기적 착각의 열쇠이다.



1789년의 '자유당원'의 이데올로기는 감추어져 있는 '계층의 이익'을 표현한다. 개인의 성스러운 권리나 '자유'의 요청이라는 이름으로 1789년의 혁명가들은 '협동조합'을 없앴다. 정통 왕조파는 토지 소유주를 대변하여 오를레앙파는 산업재산 소유주를 대변한다.



골드만(Goldmann) "인간은 진심으로 자신의 사유와 행동을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집단의 이익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변형시키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지배계층은 항상 그 계층의 이익의 요청을 일반적 이익 자체의 요청인 것처럼 나타내려 한다.



다른 계층을 착취하는 계층의 이익은 보편적이고 독립덕인 이익이라는 이데올로기 가면으로 안으로 숨으려 한다(se dissimuler).



마르크스는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된 사회적인 관계는, 결정한 사람들 자신을 위하여, 사물들 간의 관계라는 환상적인(fantastique) 형식의
옷을 입는다." (이양희는 한겨레 신문을 흔들며 봐라 한겨레도 음모론이라 했다고 방송대담에서 말했다.)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착각은 욕망의 전능함을 증명하는 동시에 갈등에 의한 욕망의 위장(travestissment)을 증명한다.



마르크스 "어떤 당파가 내거는 문구나 공상을 그 당파의 실제적인 조직이나 물질적인 이익과 구별하여야 하며, 그들의 상상을 그들의 실재와 구별하여야 한다."



- 계급 없는 사회는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없고 어떠한 착각도 없는 철학의 도래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이에 대해



루이 알튀쎄르(Louis Althusser)는 『마르크스를 위하여(Pour marx)』에서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가장 미묘한 질문을 회피하지 않기 위하여, 공산 사회 자체가 도덕이든 예술이든 세계에 대한 표상이든 이데올로기 없이도 지낼 수 없다는 것을 사적 유물론은 인정할 수 없다."



데카르트의 지각 개념으로부터 현대의 이데올로기론까지, 스피노자에서 알튀쎄르까지, 모두가 이성과 욕망의 이원성 때문에 착각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착각은 욕망의 투영이며, 착각의 합리화 (즉 착각 특유의 자기 정당화)는 비이성적인 것에 봉사하고 있다.





8. 칸트: 순수이성의 착각



*형이상학적 착각의 근원은 감정인가?



형이상학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투장"이다. '의견이 일치가져다 줄 수 있는 명제가 없다'는 불가능성은, 형이상학의 착각적 특징을 인정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종교에서 착취자의 술책과 가난한자의 비천함에 대한 공상적 위로를,



니체는 피안에 대한 신화를 연약한 자, 인생의 패배자가 창안한 것으로,



프로이드는 아버지의 죽음이 신의 탄생이라고 보았다.



형이상학적 착각은 감정의 딸이며, 비합리적인 것에서 나온 것이며, 참된 이성과 반대가 되는 "심장의 이성(raison du coeur)"이다.
(Pascal; 기하의 정신과 섬세의 정신)



*형이상학적 착각의 근원은 이성 자체이다.



칸트(Kant)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착각은 순수이성 자체에서 유래한다.



현상은 우리의 감각에 나타나는 것이며,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는 사물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 "나의 지각의 선천적 형식"(공간과 시간)에 의해서 굴절된 세계이다.



현상은 진리와 오류의 판단에 앞서는 감각적인 재료이다.



*세 가지의 오류



칸트는 세 가지의 오류



-감각의 오류 (상상에 의해서 생긴오류,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



-논리적 추리의 오류(삼단논법에서 오류추론)



-형이상학적 오류(신의 존재 인간의 자유 영혼불멸)



추리의 오류(두 번째 오류)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착각이 아니다.



첫 번째 오류(지각현상으로부터 나온 오류 판단)와 세 번째 오류(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검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명제)는 착각이다.



*이성은 착각을 피할 수가 없다.



칸트에 의하면, 불가피한 형이상학적 착각은 이성 자체의 본성으로부터 나온다.



형이상학적 착각은 이성의 내면적인 요청(exigence), 존재라는 형태를 가지고 외부에 투영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이성의 내면적인 요청으로부터 유래한다.



칸트: 착각은 관점의 이원성을 전재로 하지만, 이 이원성은 이성과 욕망의 이원성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립은 오성과 이성 사이에, 즉 객관적인 과학을 성립시키는 오성과 우리의 판단들을 통일하려는 이성 사이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 철학과 착각: 비판(critique)과 낌새(의혹soupçon)



*착각은 어떠한 반박을 받더라도 살아 남는다.(elle survit aux réfutations)



착각은 반박을 받더라도 살아 남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데올로기의 사람은 신경증 환자와 비슷하다.



* '낌새(의혹)'의 철학은 착각에 숨겨져 있는 동인(mobiles)을 탐구한다.



의혹 철학(낌새의 철학, philosophie du soupçon) -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 에서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관념을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착각이라고 생각하면 숨겨진 동인이나 무의식적인 근원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동인(근원)에서 나온 것은 모두 의미(sens)있다. 그래서 프로이트 다음에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를 쓴다.)



버클리(Berkeley)의 비물질 철학(l'immatérialisme)은 반박할 수 있는 오류가 아니라 무의식적 근원에서 찾아내 야하는 착각이다. 왜 버클리는 물질의 존재를 부인하였는가? 만성 설사복통에 의한 무의식적인 심리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브뤼에르(Claude Bruaire) "낌새를 알아차린다(의혹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관념을 그 관념이 나오는 모호하고 비밀스러운 어떤 것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낌새(의혹)의 철학에 의하면, "모든 명제는 그 명제가 감추고 있는 그 명제의 이면 세계 속에서, 등뒤로부터 탐구되어져야 한다."



*의혹 철학의 폐단



우선, 착각에 대한 체계적인 고발에는 심오한 면이 있다. 그리고, 망치의 철학(ppilosophie au marteau), 동굴의 벽을 탐사하는 동굴학자의 망치를 가진 철학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자신이 논박하려는 어떤 이론을 착각이라고 미리 가정해서는 안 된다. 먼저 오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하고 그 다음에 이 오류는 착각이며, 이 오류의 근원은 숨겨진 동인, 무의식적 욕망이라는 것을 밝혀야한다.
(문제는 이데올로기 문제에서 오류를 밝히는 것이 선행되야 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 승리자가 새로운 저항에 항상 써먹는 수법과 같다. 그런데, 이 수법의 오류에 답할 수 있는 것은 역사뿐인 것 같다. 상반세기와 하반세기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지배를 받은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자주를 설명하고. 부역자(collaborateur)의 오류 먼저 밝혀야 한다는 것은 공염불일 것 같다. 위정자가 백성을 짓밟고도 부귀 영화를 누리고, 국회의원이 음모론을
펼쳐도 건장하게 지위를 누리고 살아가는 데 누가 누구의 삶의 모습을 말하겠는가? 이런 이데올로기의 승리가 백성의 비천한 삶의 토대 위에 있다고
말한 낌새철학이 설 수 있는 것은 혁명을 맞본 나라에서 가능한가?)



낌새(의혹) 철학자들이나 착각 고발자들의 지나친 투시력도 그 자체가 불관용의 가면(masque de l'intolérance)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한번 혁명을 거쳐 보았더라면...)



아롱(R. Aron)은 40년 전에 "공식: 이데올로기는 나의 적의 관념이다. 이 공식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장 덜 나쁜(나쁘지 않는) 정의들 중의 하나이다." 낌새(의혹)의 철학은 - 상대방에게 있는 착각을 체계적으로 가정하면서도 - 알끼에(Alquié)가 말하는 경멸의 철학(philosophie du mépris)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일러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판다와의 여행  (0) 2008.08.13
무한도전  (0) 2008.01.14
자기 인생의 리더  (0) 2008.01.08
이제 실현되기를 꿈꾸며 나는 달린다.  (0) 2008.01.08
떠나자.  (0) 2008.01.08
Posted by 자박자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