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까지의 학문은 대부분 존재 그 자체와 존재자와의 사이에 있는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존재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이다. 즉 지금까지의 학문은 대부분 존재 그 자체와 존재자와의

사이에 있는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자각이 없는 학문이었다고 하이데거는 지적했다.

인간이라는 존재자에게 열려 있는 '갈라진 틈새'를 '개시성'이라 불린다.

개시성이란 인간은 광물처럼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왜나면 광물의 경우는 존재 그 자체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도, 갈라진 틈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갈라진 틈새가 존재 하기 때문에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

죽음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동물에게 시간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현존재가 산출되는 시간 속에서 '존재 자체'의 의미가 열린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했지만,

그러나 최종적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세계 생성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하이데거는 존재 그 자체로 부터 인간의 의미를 밝히는 쪽으로 사색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때, 인간 존재의 기반을 '고향과 동일시하면서 애국심을 절대화한 나치즘에 접근하게 되었다.

Posted by 삽화가 장명진 자박자박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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