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까지의 학문은 대부분 존재 그 자체와 존재자와의 사이에 있는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존재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이다. 즉 지금까지의 학문은 대부분 존재 그 자체와 존재자와의

사이에 있는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자각이 없는 학문이었다고 하이데거는 지적했다.

인간이라는 존재자에게 열려 있는 '갈라진 틈새'를 '개시성'이라 불린다.

개시성이란 인간은 광물처럼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왜나면 광물의 경우는 존재 그 자체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도, 갈라진 틈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갈라진 틈새가 존재 하기 때문에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

죽음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동물에게 시간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현존재가 산출되는 시간 속에서 '존재 자체'의 의미가 열린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했지만,

그러나 최종적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세계 생성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하이데거는 존재 그 자체로 부터 인간의 의미를 밝히는 쪽으로 사색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때, 인간 존재의 기반을 '고향과 동일시하면서 애국심을 절대화한 나치즘에 접근하게 되었다.

Posted by 자박자박 :

소크라테스가 한 젊은이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질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는것 조차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서 진리에 다다를 수가 있을까?

하이데거의 답은 이랬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불안과 죽음의 자각을 통해서 진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답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발표하면서 후설에게 바치는 헌사가 있다.

그러나 이책은 후설이 하이데거를 비판한 책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 자체에 주목했다.인간을 후설의 경우처럼 세계를 구성하는 순수의식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지도;;않은 세계에 자의와 상관없이 던져진 존재라고 지적했다.

인간은 자의와 상관없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이런 상태를 피투성(Geworfenheit)이라 이름붙이고 기분중에도 불안을 통해서 자각된다.

예를 들어 '왜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을까'.'왜 나는 여기에 존재하는가'라는 불안으로부터 자신이

이세상에 던져졌고 여기에서 절대로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피투성)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일단 피투성을 자각할 때 '인간은 언젠간 죽고 이 세계를 강제로 떠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예리하게 의식하는것을 '선구적 각오성'이라 불렀다.

인간은 불안을 통해서 피투성에 직면하지만,역으로 이런 상황 때문에 최초로 존재와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획득한다.

이런 재구성하는 시도는 '기투'불린다.

Posted by 자박자박 :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에 의해 의식체험의 영역을 확보하는 한편,여기서 서로 분리하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1. 인식에 나타나는 대상과 연관된 재료의 측면2. (노에시스)의미적인 통합이 되지 않은 질료를 활성화해서 의미를 부여하는즉,대상을 의미로서 구성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작용의 측면.

 

한편 질료에 노에시스가 작용해서 생겨난 '의미'를 노에마라고 불렀다. 노에마는 재료와도 다르고 작용과도 다르다.

 

'생각할(노에시스) 때만, 나(노에마)는 존재한다.'

 

Posted by 자박자박 :

우리의 통상적인 의식작용과 관계없이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외부세계의 대상물이,

항상 어떤 의미로서 인간의 의식에 인식되고 있다는 점!

의식의 상관자로서 나타날 때, 모든 것은 반드시 '의미'로서 등장한다.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즉 존재 가능한 대상은 항상 어떤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은 항상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그것에 어떤 의미 규정을 부여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식의 특성을 후설은'지향성'이라 불렀다.

의식은 지향성을 작용시키며 우리들은 의미만을 인지한다.

의미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언어만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는 '작용'이 필요하다.

아직 언어화 되지 않은 질료에 대해서 그것에 어울리는 '작용'이 필요하고

의식은 판단작용과 판단 내용이 합해서 '의미'를 산출하는 시스템을 나타낸다.

Posted by 자박자박 :

과학의 상식은 '대체로' 그렇다..이지 '엄밀하게' 그런것은 아니다.

우리의 감각은 세계를 정확히 파악할수 없으며(자주 오류를 범한다.),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라고 해서 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외부세계의 관한 모든 이론은 추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학문의 절대적이고 확실한 기반을 어떻게 찾낼 수 있을까?

후설이 채택한 방법은 확실한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이 역발상이다.

우리의 인식이 틀린 것은 아닐까 하는 근심은, 우선 '물(物만물)자체'를 전제해 놓고서

이것을 우리가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걸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물 자체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고,

이런 판단중지 이후에 나타 나는 세계를정확히 기술하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는 물 자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가'.라는 물음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엄밀한 기반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현상학이 '외부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니고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보이는 세계는 머릿속에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작용의 상관자로서만 외부세계를 인식한다'는 변경이다.

이렇게 학문의 확고한 기반을 도출해낸 후설은 , 이어서 이 세계의 성립 과정을 분석 하고 기술했다.

Posted by 자박자박 :

인간의 인식, 이해작용의 근본적인 지평을 형성한다.

지평의 개방선은 두가지로 귀결된다.

1. 현재의 지평과의 관계속에서 과거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

(예: 20세기 전반에 다른 학자들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 스스로도 실패로 간주했던

'우주항'이 최신 우주론의 지평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것)

2. 귀결점은 현재의 지평이 계속해서 융합되어온 지평의, 단지 현시점에서의 최종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

(예: 현재의 지평은 무(無)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영향의 작용을 받아 성립된 것이다.

'영향과 작용의 역사' 우리 행위 전체는, 과학으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이런 역동적인

영향과 작용의 역사적 과정속에 있다.이런 자각하에서 우리의 진리탐구와 실천이 가능해진다.)

Posted by 자박자박 :

비과학적 철학

과학=설명

설명은 대상을 여러 요소로 분해하는 과정을 통해 인과법칙을 발견하는것!

즉 오차범위를 설정하고, 그 속에서 대상을 유형화, 단순화함으로써

모든 대상을 반복 가능한 것으로 파악하려 한 것이다.

설명이란 방법으론 개별적이며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삶'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삶을 외부로부터의 인과법칙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은 삶 그 자체로서 이해해야만 한다".는 근본적인 가정을 도출해 냈다.

'삶'의 직접체험은 역사를 통해서 이해된 것이다. 딜타이에게 '삶'의 이해는 역사를 이해하는것

삶을 체험하는 방법으로서의 해석학이 요구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자박자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