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꿈을 향해 자신을 가지고 전진한다면,
그리고 상상해 왔던 삶을 이어간다면,
그는 예상치 못한 성공과 만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꿈을 향해 자신을 가지고 전진한다면,
그리고 상상해 왔던 삶을 이어간다면,
그는 예상치 못한 성공과 만나게 될 것이다.
희망은 잠자고 있지 않는 인간의 꿈이다.
인간의 꿈이 있는 한 이 세상은 도전해 볼만하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꿈을 잃지 말자.
꿈을 꾸자.
꿈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New Classmate (2) | 2012.03.29 |
---|---|
한국인의 이중심리 (0) | 2007.08.08 |
복제기술시대의 예술의 가능성 (0) | 2007.05.21 |
소외-사회가 ''본래적인 것'' 만들어낸다. (0) | 2007.05.15 |
[사르트로]실존-미리 정해진 올바른 삶의 방식이란 없다. (0) | 2007.02.13 |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나에겐 아직 걸을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는가..
그걸도 족하다. 그 힘만 있어도 난 무슨일이든 해낼 수 있다.
뒤 돌아 보지 말자.
다시 시작 하면 그만이다.
오직 나에겐 미래만이 존재할 뿐!
사람은 때가 있고 그것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면
반듯이 올것이다. 난 다시 믿고 또 믿는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역시 태어나길 잘했다. 멋진 세상을 위하여 오늘도 건배
한국인의 대표적인 심리유형은 이중성이다.
순수와 배타, 신바람과 광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근본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시류에 영합하고
동일성을 강조하지만 서로 분열한다.
’한국인의 공동심리 유형들과 그 양면성’에서
한국인의 대표적인 심리 유형으로
’순수성의 감정과 이중성’, 신바람과 광기’, ’동일성의 병적 징후’이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윤동주의 ’서시’는 순수한 영혼의 애가다.
또 14세기 말 고려 충신 우탁부터 조선 중기 기생 송이에 이르기까지
150여 수의 시조를 분석한 결과 순수성을 은유한 시조들이 50여 수에 이른다.
이처럼 한국인은 예부터 순수의 가치를 지고의 것으로 높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상적 순수와 불행한 현실의 괴리는 한국인의 무의식에 이분화돼 자리잡았다.
순수에 비견되는 신념윤리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반면 책임윤리는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윤리적 가치의 척도를 삼는다.
건강한 사회는 저 두 가지가 혼융돼 작용하는 것인데
택일을 강요하는 사회는 구체적인 현상을 추상적 이념으로 증발시켜버린다.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종교적 광기가 한국인의 마음을 격정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정치적 이념대립의 광기가 한국인의 마음을 갈라놓고 있다는 것.
신바람의 광기가 순수성의 이념과 결부되면 ’순수성의 악마’로 변용된다.
이는 더욱 한국문화를 끝없는 논쟁의 나락으로 추락시킬 수 있다.
한국의 공동심리유형은 동일성 일색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감정상 동류의식이 통하면 의기투합해 친근감의 극치를 이룬다.
2002년 월드컵 응원열기는 전 민족적인 동류의식이 작용한 결과인 셈이다.
동일성의 추구는 언뜻 보기에 강력한 단결력을 발휘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람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동일성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이다.
오히려 같기를 바라는 마음이 큰 까닭에 차이를 목격하면 서운한 감정이 앞서게 된다.
한국인은 모여 살면서 동질성의 정을 주고 싶어하지만 현실적으로 일체감이 잘 형성되지 않아 서로 분열한다.
역설적으로 한국인은 지금 지역적ㆍ정치적ㆍ이념적ㆍ종교적 배타심 등으로 자신의 동일성을 지키려 한다.
어떤 차이도 감정적으로 싫어하고 오로지 대등의식이 평등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감정적 동일성이라는 허상을 빨리 씻어내야 대등의식과 소모적 경쟁이라는 병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New Classmate (2) | 2012.03.29 |
---|---|
내방 (2) | 2007.09.03 |
복제기술시대의 예술의 가능성 (0) | 2007.05.21 |
소외-사회가 ''본래적인 것'' 만들어낸다. (0) | 2007.05.15 |
[사르트로]실존-미리 정해진 올바른 삶의 방식이란 없다. (0) | 2007.02.13 |
아우라. "아무리 가까워도 아득히 멀리 존재하는 것의 한 번 뿐인 현상"
즉 아우라는 지금 여기서의 1회에 한정된 사건이며, 단 하나의 오리지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예술잡품은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교회에 묘사된 그림을 보는 것은 절대적인 신을 마주 하는 것이며
아우라를 경험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의 세속화된 예술숭배에서도, 유일무이한 오리지널한 작품과의
마주 한다는 의미로 이 아우라는 존속 되었다.
그러나 사진과 영화라는 복제 가능한 예술의 등장에 의해 단지 하나의 작품,
지금 여기라는 1회에 한정된 체험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내방 (2) | 2007.09.03 |
---|---|
한국인의 이중심리 (0) | 2007.08.08 |
소외-사회가 ''본래적인 것'' 만들어낸다. (0) | 2007.05.15 |
[사르트로]실존-미리 정해진 올바른 삶의 방식이란 없다. (0) | 2007.02.13 |
[야스퍼스]한계상황/포괄자-이성의 한계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0) | 2007.02.13 |
포이에르바흐는, 종교란 인간의 본질이 대상화된 것으로서, 종교가 하나의 권위가 됨으로
인해 인간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다는 생각했으며,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를 비판했다.
포이에르바흐는 확실히 소외하는 개념을 '본래적인 것(인간성)으로 부터 배제되어 있다.;
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포이에르바흐에게는 '본래적인 것'으로서의 인간성을 되찾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포이에르바흐이 사고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소외라는 개념에서 경정적인 단정을 초래했다.
확실이 마르크스도 그 초기에는, 인간 본질의 대상화인 노동이 어떤 사회적 조건 밑에서 소외된 노동이 되는가를
지적했다. 여기서 말하는 소외된 노동은 원래 창조적으로 영위돼야 할 노동으로 부터 배제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소외라는 개연이 성립하는 구도에는 항상 '본래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하게 된다. 이런 구도에서
말한다면, 포이에르바흐의 인간 본질도 단지 종래의 신의 위체에 인간을 대치한 것 뿐인 추상물에 불과한 것이며
'창조적 노동' 또한 마찬가지다.
현실의 모든 개인을 '사회적 관계 속으로 형성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의 모순을 분석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마르크스에게서 소외라는 개념은 이 개념 자체가 가진 한계를 확정 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