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Classmate

2012. 3. 29. 15:38 from 기본카테고리


한숨 돌리다...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보낸 4개월이었다.
돌이켜 보면 괴물 같았던 나..
폭주 하지 않고 잘 견디어 주었다.
이제 다 비워 내고 다시 시작해야지
지금의 단련을 몸으로 기억해 내리라 믿는다.

복싱을 시작했다. 원투!^^
드디어 어린시절 꿈꾸었던
일들 중에 하나를 더 시작한다.
속에서 부터 끓어 오르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혹시 이 나이에 복서가 되라는 하늘의 계시인가?
오늘이 흥분되고, 내년이 기대 된다.^^

Posted by 자박자박 :

내방

2007. 9. 3. 09:29 from 기본카테고리


















Posted by 자박자박 :

한국인의 대표적인 심리유형은 이중성이다.

순수와 배타, 신바람과 광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근본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시류에 영합하고

동일성을 강조하지만 서로 분열한다.

’한국인의 공동심리 유형들과 그 양면성’에서

한국인의 대표적인 심리 유형으로

’순수성의 감정과 이중성’, 신바람과 광기’, ’동일성의 병적 징후’이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윤동주의 ’서시’는 순수한 영혼의 애가다.

또 14세기 말 고려 충신 우탁부터 조선 중기 기생 송이에 이르기까지

150여 수의 시조를 분석한 결과 순수성을 은유한 시조들이 50여 수에 이른다.

이처럼 한국인은 예부터 순수의 가치를 지고의 것으로 높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상적 순수와 불행한 현실의 괴리는 한국인의 무의식에 이분화돼 자리잡았다.

순수에 비견되는 신념윤리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반면 책임윤리는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윤리적 가치의 척도를 삼는다.

건강한 사회는 저 두 가지가 혼융돼 작용하는 것인데

택일을 강요하는 사회는 구체적인 현상을 추상적 이념으로 증발시켜버린다.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종교적 광기가 한국인의 마음을 격정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정치적 이념대립의 광기가 한국인의 마음을 갈라놓고 있다는 것.

신바람의 광기가 순수성의 이념과 결부되면 ’순수성의 악마’로 변용된다.

이는 더욱 한국문화를 끝없는 논쟁의 나락으로 추락시킬 수 있다.


한국의 공동심리유형은 동일성 일색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감정상 동류의식이 통하면 의기투합해 친근감의 극치를 이룬다.

2002년 월드컵 응원열기는 전 민족적인 동류의식이 작용한 결과인 셈이다.

동일성의 추구는 언뜻 보기에 강력한 단결력을 발휘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람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동일성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이다.

오히려 같기를 바라는 마음이 큰 까닭에 차이를 목격하면 서운한 감정이 앞서게 된다.

한국인은 모여 살면서 동질성의 정을 주고 싶어하지만 현실적으로 일체감이 잘 형성되지 않아 서로 분열한다.

역설적으로 한국인은 지금 지역적ㆍ정치적ㆍ이념적ㆍ종교적 배타심 등으로 자신의 동일성을 지키려 한다.

어떤 차이도 감정적으로 싫어하고 오로지 대등의식이 평등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감정적 동일성이라는 허상을 빨리 씻어내야 대등의식과 소모적 경쟁이라는 병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자박자박 :

아우라. "아무리 가까워도 아득히 멀리 존재하는 것의 한 번 뿐인 현상"

즉 아우라는 지금 여기서의 1회에 한정된 사건이며, 단 하나의 오리지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예술잡품은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교회에 묘사된 그림을 보는 것은 절대적인 신을 마주 하는 것이며

아우라를 경험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의 세속화된 예술숭배에서도, 유일무이한 오리지널한 작품과의

마주 한다는 의미로 이 아우라는 존속 되었다.

그러나 사진과 영화라는 복제 가능한 예술의 등장에 의해 단지 하나의 작품,

지금 여기라는 1회에 한정된 체험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Posted by 자박자박 :

소외란 사전적의미론 '어떤 것으로 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 제외된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적으로 접근해서 예를 들어본다면..

차가 지나가지 않는데도 길을 건너려 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본래적인 것(위험의 유무)로부터

소외 되어 신호등이라는 장치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외라는 말을 가장 먼저 철학적 개념으로 사용한 사람은 헤겔이다. '소외'는 부정적인 의미보다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인간은 자연성으로 부터 분이돼서(즉 소외돼서) 자연을 대상화람으로써

사회를 형성해내는 데 필연적인 것, 즉 긍정적인 것이 된다.

Posted by 자박자박 :

사물의 진상을 알기 위해선 사물의 본질을 포착할 필요가 있다.

인간에 관해서 보편적인 본질을 미리 결정해두는 것이 가능할까?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사무라이는 주인을 위해 죽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서 회사를 위해 죽는 것이 당연할까?

인간의 삶의 방식에는 공통된 기준이 결정 돼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은 받아들이는 것을 전부 대상화한다. 그 결과 의식이 자기 자신에게 향할 경우

의식은 대상화되며, 따라서 의식이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는 작용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때문에 반성에 의해 자신과 완전히 일치 되거나 자신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상성에 함몰된 대상으로서의 자기를 넘어서고, 주체성의 회복을 외도하는 실존주의가 제시하는 삶의

방식은 단순한 윤리로부터가 아니라 이런 의식의 구조에 대한 통찰로 부터 도출된 것이다.

Posted by 자박자박 :

야스퍼스에게 한계상황은 '우리가 그 앞에 섰을 때 좌절할 수밖에 없는 벽 같은 것' 이다.

한계상황의 구체적인 예로는 죽음, 투쟁, 고뇌 그리고 우리가 역사적으로 짊어진 이런저런 규정성

등을 들 수 있다. 인간은 그런 한계상황을 진지하게 받아 들임으로써, 하나뿐이며 한번뿐인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다.

직시 함으로써 초월자의 세계로 자신을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계기이다.

이런 초월자를 야스퍼스는 '포괄자'라고 부른다.이 세계에는 결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성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이성의 세계와 비합리적인 세계의 단절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성으로 모든것을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헤겔적인 오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결코 해명되지 않는 부조리와 비합리적인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세계를 객관적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성의 한계가 있다고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한계에 직면했을때 한계를 인정하고 진정으로 자각할 수 있다.

이성의 한계 이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포괄자'는 동시에 우리 삶의 지평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객관적인 합리성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보았지만, 그것은 인간 이성의 범위 안에서 확실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있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자박자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