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바로 떠나라. 당신이 꿈꾸는 세계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바로 떠나라. 당신이 꿈꾸는 세계로
꿈으로 잠이 지탱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꿈 때문에 잠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둬야 한다.
꿈의 환각이 납득이 가는 목적을 달성시키는 일이 때때로 있다면
우리는 꿈의 환각이 반대의 작용을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프로이트의 '다이내믹한 꿈의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꿈에 관해서 오해하기 쉬운 점은 그것이 우리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인과관계가 있다는 점에서가 아니다.
도리어 꿈은 스토리의 일부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특히 그 부분이 생생하기 때문에 나머지 부분이 희미하게 보인다는 점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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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의 주머니 속에는 꿈이 있고, 패자의 주머니 속에는 욕심이 있다.
어떤 사람이 꿈을 향해 자신을 가지고 전진한다면,
그리고 상상해 왔던 삶을 이어간다면,
그는 예상치 못한 성공과 만나게 될 것이다.
희망은 잠자고 있지 않는 인간의 꿈이다.
인간의 꿈이 있는 한 이 세상은 도전해 볼만하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꿈을 잃지 말자.
꿈을 꾸자.
꿈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나에겐 아직 걸을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는가..
그걸도 족하다. 그 힘만 있어도 난 무슨일이든 해낼 수 있다.
뒤 돌아 보지 말자.
다시 시작 하면 그만이다.
오직 나에겐 미래만이 존재할 뿐!
사람은 때가 있고 그것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면
반듯이 올것이다. 난 다시 믿고 또 믿는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역시 태어나길 잘했다. 멋진 세상을 위하여 오늘도 건배
포이에르바흐는, 종교란 인간의 본질이 대상화된 것으로서, 종교가 하나의 권위가 됨으로
인해 인간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다는 생각했으며,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를 비판했다.
포이에르바흐는 확실히 소외하는 개념을 '본래적인 것(인간성)으로 부터 배제되어 있다.;
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포이에르바흐에게는 '본래적인 것'으로서의 인간성을 되찾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포이에르바흐이 사고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소외라는 개념에서 경정적인 단정을 초래했다.
확실이 마르크스도 그 초기에는, 인간 본질의 대상화인 노동이 어떤 사회적 조건 밑에서 소외된 노동이 되는가를
지적했다. 여기서 말하는 소외된 노동은 원래 창조적으로 영위돼야 할 노동으로 부터 배제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소외라는 개연이 성립하는 구도에는 항상 '본래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하게 된다. 이런 구도에서
말한다면, 포이에르바흐의 인간 본질도 단지 종래의 신의 위체에 인간을 대치한 것 뿐인 추상물에 불과한 것이며
'창조적 노동' 또한 마찬가지다.
현실의 모든 개인을 '사회적 관계 속으로 형성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의 모순을 분석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마르크스에게서 소외라는 개념은 이 개념 자체가 가진 한계를 확정 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