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 "아무리 가까워도 아득히 멀리 존재하는 것의 한 번 뿐인 현상"

즉 아우라는 지금 여기서의 1회에 한정된 사건이며, 단 하나의 오리지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예술잡품은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교회에 묘사된 그림을 보는 것은 절대적인 신을 마주 하는 것이며

아우라를 경험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의 세속화된 예술숭배에서도, 유일무이한 오리지널한 작품과의

마주 한다는 의미로 이 아우라는 존속 되었다.

그러나 사진과 영화라는 복제 가능한 예술의 등장에 의해 단지 하나의 작품,

지금 여기라는 1회에 한정된 체험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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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르바흐

2007. 5. 15. 10:35 from 일러스트

포이에르바흐는, 종교란 인간의 본질이 대상화된 것으로서, 종교가 하나의 권위가 됨으로

인해 인간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다는 생각했으며,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를 비판했다.

포이에르바흐는 확실히 소외하는 개념을 '본래적인 것(인간성)으로 부터 배제되어 있다.;

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포이에르바흐에게는 '본래적인 것'으로서의 인간성을 되찾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포이에르바흐이 사고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소외라는 개념에서 경정적인 단정을 초래했다.

확실이 마르크스도 그 초기에는, 인간 본질의 대상화인 노동이 어떤 사회적 조건 밑에서 소외된 노동이 되는가를

지적했다. 여기서 말하는 소외된 노동은 원래 창조적으로 영위돼야 할 노동으로 부터 배제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소외라는 개연이 성립하는 구도에는 항상 '본래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하게 된다. 이런 구도에서

말한다면, 포이에르바흐의 인간 본질도 단지 종래의 신의 위체에 인간을 대치한 것 뿐인 추상물에 불과한 것이며

'창조적 노동' 또한 마찬가지다.

현실의 모든 개인을 '사회적 관계 속으로 형성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의 모순을 분석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마르크스에게서 소외라는 개념은 이 개념 자체가 가진 한계를 확정 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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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란 사전적의미론 '어떤 것으로 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 제외된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적으로 접근해서 예를 들어본다면..

차가 지나가지 않는데도 길을 건너려 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본래적인 것(위험의 유무)로부터

소외 되어 신호등이라는 장치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외라는 말을 가장 먼저 철학적 개념으로 사용한 사람은 헤겔이다. '소외'는 부정적인 의미보다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인간은 자연성으로 부터 분이돼서(즉 소외돼서) 자연을 대상화람으로써

사회를 형성해내는 데 필연적인 것, 즉 긍정적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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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진상을 알기 위해선 사물의 본질을 포착할 필요가 있다.

인간에 관해서 보편적인 본질을 미리 결정해두는 것이 가능할까?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사무라이는 주인을 위해 죽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서 회사를 위해 죽는 것이 당연할까?

인간의 삶의 방식에는 공통된 기준이 결정 돼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은 받아들이는 것을 전부 대상화한다. 그 결과 의식이 자기 자신에게 향할 경우

의식은 대상화되며, 따라서 의식이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는 작용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때문에 반성에 의해 자신과 완전히 일치 되거나 자신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상성에 함몰된 대상으로서의 자기를 넘어서고, 주체성의 회복을 외도하는 실존주의가 제시하는 삶의

방식은 단순한 윤리로부터가 아니라 이런 의식의 구조에 대한 통찰로 부터 도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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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퍼스에게 한계상황은 '우리가 그 앞에 섰을 때 좌절할 수밖에 없는 벽 같은 것' 이다.

한계상황의 구체적인 예로는 죽음, 투쟁, 고뇌 그리고 우리가 역사적으로 짊어진 이런저런 규정성

등을 들 수 있다. 인간은 그런 한계상황을 진지하게 받아 들임으로써, 하나뿐이며 한번뿐인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다.

직시 함으로써 초월자의 세계로 자신을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계기이다.

이런 초월자를 야스퍼스는 '포괄자'라고 부른다.이 세계에는 결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성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이성의 세계와 비합리적인 세계의 단절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성으로 모든것을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헤겔적인 오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결코 해명되지 않는 부조리와 비합리적인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세계를 객관적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성의 한계가 있다고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한계에 직면했을때 한계를 인정하고 진정으로 자각할 수 있다.

이성의 한계 이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포괄자'는 동시에 우리 삶의 지평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객관적인 합리성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보았지만, 그것은 인간 이성의 범위 안에서 확실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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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까지의 학문은 대부분 존재 그 자체와 존재자와의 사이에 있는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존재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이다. 즉 지금까지의 학문은 대부분 존재 그 자체와 존재자와의

사이에 있는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자각이 없는 학문이었다고 하이데거는 지적했다.

인간이라는 존재자에게 열려 있는 '갈라진 틈새'를 '개시성'이라 불린다.

개시성이란 인간은 광물처럼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왜나면 광물의 경우는 존재 그 자체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도, 갈라진 틈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갈라진 틈새가 존재 하기 때문에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

죽음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동물에게 시간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현존재가 산출되는 시간 속에서 '존재 자체'의 의미가 열린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했지만,

그러나 최종적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세계 생성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하이데거는 존재 그 자체로 부터 인간의 의미를 밝히는 쪽으로 사색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때, 인간 존재의 기반을 '고향과 동일시하면서 애국심을 절대화한 나치즘에 접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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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가 한 젊은이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질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는것 조차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서 진리에 다다를 수가 있을까?

하이데거의 답은 이랬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불안과 죽음의 자각을 통해서 진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답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발표하면서 후설에게 바치는 헌사가 있다.

그러나 이책은 후설이 하이데거를 비판한 책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 자체에 주목했다.인간을 후설의 경우처럼 세계를 구성하는 순수의식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지도;;않은 세계에 자의와 상관없이 던져진 존재라고 지적했다.

인간은 자의와 상관없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이런 상태를 피투성(Geworfenheit)이라 이름붙이고 기분중에도 불안을 통해서 자각된다.

예를 들어 '왜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을까'.'왜 나는 여기에 존재하는가'라는 불안으로부터 자신이

이세상에 던져졌고 여기에서 절대로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피투성)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일단 피투성을 자각할 때 '인간은 언젠간 죽고 이 세계를 강제로 떠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예리하게 의식하는것을 '선구적 각오성'이라 불렀다.

인간은 불안을 통해서 피투성에 직면하지만,역으로 이런 상황 때문에 최초로 존재와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획득한다.

이런 재구성하는 시도는 '기투'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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